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무예(武藝)의 고수(高手)를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하지 않고 당연히 건륭황제를 꼽을 것이다.
건륭(乾隆,1711∼1799)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출중한 황제일 뿐만아니라, 차(茶)를 매우 즐겨 마시며 사랑했던 다인(茶人)이기도 했다.
그는 차에 매우 심취하여 일찍이 여섯차례나 항주(杭州)로 내려가 다원(茶園)을 살펴보았으며 차농(茶農:차를 재배하고 만드는 농부)들의 채차(采茶:차를 따는 일)와 제차(制茶)과정을 세심히 관찰하기도 하였다.
건륭은 또 무공(武功)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평소 시(詩)를 짓기를 좋아해서 중국 역대 제왕들 중에서 가장 많은 다시(茶詩)를 남긴 황제이기도 하다.
그는 서호(西湖)의 용정차(龍井茶)를 마시고는 그 맛에 매료되어 무려 다섯차례나 붓을 들어 용정차에 대한 애착을 시(詩)로 읊기도 했다.《
관채다작가(觀采茶作歌)》.《관채다작가지이(觀采茶作歌之二)》.《좌용정상팽다우성(坐龍井上烹茶偶成)》.《하로팽다(荷露烹茶)》그리고《재유용정작(再遊龍井作)》등이 바로 그것이다.
건륭의 애다(愛茶)의 정(情)이 충분히 반영된 이 시들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많은 다인(茶人)들에 의해 애독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아직도 회자(膾炙)되고 있다.
건륭은 또 직접 채다(采茶:찻잎을 따는 것)를 했을 정도로 차에 심취하기도 했다. 중국의 서자호반(西子湖畔)에는 건륭이 직접 채다했다는 열여덟 그루의 차수가 "어다원(御茶園)"이란 이름으로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어 많은 다인(茶人)들과 관광객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건륭은 일생동안 차를 사랑하여 각지의 명차(名茶)를 광범위하게 마셔보았을 뿐만 아니라, 차를 다리기에 마땅한 물에 대한 연구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어명(御命)을 내려 은(銀)으로 되박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은되박으로 각지의 유명한 샘물을 떠서 물의 비중을 측량하게 한뒤, 샘물의 우열을 가리어 다음과 같이 샘물의 서열을 정하였는데, 북경의 옥천(玉泉)이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이요, 진강(鎭江)의 금산사천(金山寺泉)이 "천하제이천(天下第二泉)"이며, 무석(無錫)의 혜산천(惠山泉)이 "천하제삼천(天下第三泉)"― 중국의 다선(茶仙) 육우(陸羽)는 혜산천을 가리켜 天下第二泉이라고 하였다.―이라하였다.
건륭은 명차(名茶),명수(名水)에 대한 연구 뿐만이 아니라 다기(茶器)의 감별(鑑別)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특히 강소성(江蘇省) 의흥(宜興)에서 생산되는 자사(紫砂)에 많은 애착을 가졌다. 그는 자사(紫砂) 다기(茶器)야말로 차를 우리는데 가장 적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사 차호(紫砂茶壺)는 그 자체가 이미 문화적 의의를 아주 잘 함축하고 있는 공예품으로 뛰어난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사 다기(紫砂茶器)를 가리켜 "세상 다기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다."라고까지 극찬하였다.
건륭은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최장수를 누렸던 황제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나이 85세에 이르러 가경(嘉慶,仁宗)에게 황위(皇位)를 양위(讓位)하려하자 원로 대신 중의 한 사람이 안타까워하며 나아가 양위를 말리며 "나라에는 하루라도 임금이 없어서는 안되옵니다.(國不可一日無君)"라고 아뢰자, 건륭은 곧 크게 한바탕 웃으며 "임금은 하루도 차가 없이는 살 수가 없소이다.(君不可一日無茶)"라고 회답하였다.
이는 차(茶)가 건륭의 마음 속에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황제로서는 거의 누리기 힘든 88세의 고령으로 천수(天壽)를 다 누린 보기 드문 황제였다.
그는 양생(養生)을 중시하는 것 외에도, 일생동안 차(茶)를 기호(嗜好)함으로써 자신의 수신양성(修身養性)의 근본으로 삼았을 것이다.
'차와 건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실차 (0) | 2008.11.17 |
---|---|
두충차 (0) | 2008.11.17 |
녹차 알고 마시나요 (0) | 2008.11.17 |
차를 마시면 우리 몸에 이로운 점 15가지 (0) | 2008.11.12 |
녹차와커피의 카페인 차이점 (0) | 2008.11.12 |